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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

    목차

    1. 영화의 등장인물 



    2. 영화 줄거리 리뷰



    3. 왜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까?

     

    영화의 등장인물 

     

    1. 만섭 (송강호) : 딸과 함께 살고 있으며 10년 경력의 택시운전사입니다.

     

    2. 위르겐 힌츠패터(토마스 크레취만) : 독일 소속 기자이다. 광주의 소식을 듣고 광주를 취재하려 한다.

     

    3. 구재식(류준열) : 광주의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힌츠패터의 통역을 도와주고 광주를 취재할 때 도와준다.

     

    4. 황태술(유해진) :  광주의 택시운전기사이다. 극 중에서  만섭과 힌츠패터를 도와주며 그들의 탈출을 돕는다.

     

     

     

    영화 줄거리 리뷰

    극중 만섭(송강호)은 홀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싱글데디이자 택시운전사이다. 항상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하지만 여전히 친구집에 얹혀사는 셋방살이 중이다. 독일방송의 ARD기자였던 위르겐 힌츠페터는 우연히 남한에서 온 기자를 보게 되고 그에게 한국의 상황을 전해 듣고 흥미를 느껴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한국으로 입국한 힌츠페터는 과거 친분이 있던 기자와 만나 광주의 상황을 전해 듣는다. 상황을 브리핑받은 그는 취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광주행을 결심하게 된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만 섭은 동료이자 친구였던 동수에게 한 외국인이 광주까지 가는데 10만원을 준다는 소식을 듣게되고 그 돈을 벌기 위해 그럴싸한 연기를 하며 힌츠페터를 태우고 광주로 향하게된다 . 그렇게 그들은 광주에 도착하게되지만 이미 많은 군인들이 광주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협적인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만섭은 힌츠패터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요청하지만 광주에 꼭 가야만 했던 힌츠패터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만섭은 10만원이라는 큰 돈이 자신에게 꼭필요한 돈이라는 것을 알고있었기에 군인들에게 손님이 비즈니스 문제로 꼭 광주에 들어가야한다고 설득하고 애걸복걸한다. 난감해진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빨리 빠져나올것을 요구하며 바리게이트를 열어준다.바리게이트를 통과한 만섭은 곧바로 힌츠패터에게 선불을 요구하고 힌츠패터는 선불로 5만원을 지불한 뒤 다시 같이 광주로 향한다. 광주에 도착하여 보니 도시는 황량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은 대학생들을 가득채운 트럭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구재식을 만나게 된다. 구재식을 만난 그들은 곧바로 시민들이 모여 있던 광주역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진하며 거리를 메우고 있었는데 영화에서 느껴진 그들의 분위기는 평화롭고 차분했다. 힌츠패터는 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광주의 지역기자였던 최기자와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게 된다. 높은 옥상에 올라온 그들은 시위대가 많은 군인들에 의해 무차별 폭행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되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게된다, 옥상에서 촬영을 마친 힌츠패터는 더 가까이에서 그들을 촬영하기 위해 시위현장으로 뛰어들게 되고 곧바로 위험한 상황을 직면하게되지만 만섭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치게된다. 위험한 상황을 직면한 만섭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 차를 돌리게 되지만 오래된 구식 택시였던 그의 차가 퍼지게 된다. 차를 수리하려면 몇시간이 걸리는 상황이 되었고 그들은 황태술의 집에서 잠시 머무르게된다. 그곳에서 그의 가족과 구재식,만섭,힌츠패터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곧바로 광주시내에서 총성이 울리는 것을 듣게된다.그들은 광주시내 현장으로 나가게되고 그곳에서 보안사 사복조장을 만나 체포당할위기를 겪게 되지만 구재식의 희생으로 간신히 도망치게된다. 구재식은 체포전 힌츠페터에게 광주에서 벌어지는 이 참극을 전세계에 알려달라 부탁하게 되고 힌츠패터는 그를 수락한다. 황태술의 집으로 간신히 도망친 그들은 비통한 새벽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새벽 만섭은 딸에게 살아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의 집을 몰래나서게 된다. 광주를 빠져나온 만섭은 순천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게 된다. 식당에서 주인아주머니가 준 주먹밥이 광주시민들이 주었던 주먹밥과 닮아있었고 만섭은 그것을 보며 혼자 도망친 것에 대해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결국 그는 서울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서울로 향하지 않고 다시 광주로 향하게 된다. 다시 돌아온 광주는 전보다 훨씬 심각해져있었다. 그는 힌츠패터를 찾으러 병원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싸늘하게 죽어있는 구재식의 시체를 보게된다.만섭은 이를 통해 광주의 실상을 밖에 알려야겠다고 굳게 다짐하게 되고 힌츠페터와 함께 밖으로 향한다. 만섭과 힌츠패터는 광주의 상황을 촬영하고 이것을 알리기 위해 다시 서울로 향하려하지만 순천을 오가던 샛길 및 도로들이 군인들에 의해 차단되어 어쩔수없이 검문소에서 검문을 당하게 된다. 검문을 책임지던 박중사는 차량을 수색하던 와중 카메라 필름과, 번호판을 발견하게 되고 이들이 자신이 찾던 검문대상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지못한척 트렁크를 닫고 통과를 지시한다. 군인들의 검문을 겨우 통과한 그들은 빠르게 도망치지만 외국인이 보이면 모두 체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 군인들에 의해 포위되게된다. 하지만 이때 광주의 택시기사들이 만섭의 택시를 보호하며 지원하고 광주 기사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섭과 힌츠패터는 간신히 서울로 향하게 된다. 서울에 도착한 힌츠패터는 공황에서 무사히 일본행 비행기를 타게 되고 취재한 광주의 참극을 세계 곳곳에 보도한다. 몇년이 지나고 난 뒤 힌츠패터는 광주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만 섭을 수소문하게 되지만 끝내 그를 찾지 못한다. 생사를 함께했던 그들은 끝내 서로를 만나지 못하고 영화는 마무리되게 된다.

     

     

    왜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까?

     

    영화를 보다 보면 서울 및 수도권 지방이 아닌 왜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점이 들게 됩니다. 그 의문점을 해결하려면 우선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유신헌법으로 입법부와 사법부가 무의미해진 4 공화국(1972~1981) 말기 대한민국에는 모든 정보를 관리하여 오던 3대 권력기관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국군 보안사령부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다 10.26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암살당하게 되고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 마저 아웃되면서 대한민국에는 권력공백이 발생하게 됩니다. 당시 3대권력기관중 유일하게 건재함을 유지하고 있던 보안사령부가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정보권력과 10.26사건 합동 수사본부장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된 전두환은 자신을 따르고 충성하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들과 함께 자신을 숙청하려 하던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역숙청하면서 하나회를 주축으로 한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후 신군부는 대한민국의 언론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10.26 사건뉴스들로 이슈 몰이를 한 덕분에 12.12 군사반란에 대한 내용은 은폐되고 왜곡되었고 ,국민들 및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시간이 지난 80년 3월이 되어서야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지식인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신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하였고 곧바로 전국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1980년 5월 15일날 발생한 서울역 총궐기 가두시위에 15만명이 모이게 되면서 시위는 정점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신군부가 2차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헛된 소문과, 북한의 남침설이 공공연하게 국민들에게 유포되어 있는 상황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신군부의 위협에 당시 시위의 지도부는 결국 회군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렇게 15만명의 서울역 시위대는 허무하게 해산하게됩니다. 이 사건으로 신군부는 자신감을 얻게됩니다.자신감을 얻은 신군부는 이틀 뒤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통해 법적으로 계엄사령부가 국가를 통치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하여 각 대학의 학생회 간부들까지 약 600명을 체포하고 완전히 국가를 장악하게됩니다. 한편 이날 광주에서는 7개월 전 부마항쟁으로 인해서 시위대의 지위부가 해산, 구속상태이던 부산, 경남지역이나 학생회장단이 연행되어 시위가 붕괴되어 버린 서울, 경기 지역과는 다르게 전남대학교 간부 상당수가 신군부의 체포를 피한 덕분에 시위대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 수백 명의 학생들은 5.18일 아침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면 학교로 모이자는 행동지침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전남대 학생들은 이미 공수부대가 점령해 버린 자신들의 캠퍼스 앞에 모여들었고 영화의 모티브가 된 가두시위가 시작되게 됩니다. 신군부는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민주화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게 되고 현장에서 시민들과 대치중이던 공수부대에게 강도 높은 진압을 명령하게 됩니다. 당시 광주에서의 시위진압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잔혹했고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들을 발생시키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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