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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봉오동전투 대표포스터
    영화 봉오동전투 대표포스터

     

     

    목차

    1. 영화 봉오동전투 그날의 이야기

    2.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이야기

    3. 홍범도 그는 왜 귀환까지 78년이나 걸렸을까?

     

     

    영화 봉오동전투 그날의 이야기

     

    영화 봉오동전투는 실제사건이던 대한독립군의 봉오동전투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지금부터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합니다. 봉오동이라는 지역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요새와도 같습니다. 깊은 산골과 좁은 골짜기를 가지고 있어 골짜기로 유인을 성공한다면 큰 대승을 거둘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수적으로 일본군보다 약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하려면 봉오동이라는 지역은 필수조건이었습니다. 홍범도는 봉오동을 메인무대로 정하고 약 900명의 독립군을 집결시킵니다. 봉오동으로 유인하기 위해 홍범도는 약 30명의 군사를 보내 일본군을 선제공격합니다. 독립군의 기습에 분노한 일본군은 그들을 쫓아 나서게 됩니다. 당시 남양수비대장 아리요시 중위는 1개의 중대를 출격시켜 독립군을 섬멸하려 했습니다. 1개 중대를 출격시키지만 매복된 독립군에게 대패하고 아라요 시중 위는 후퇴하게 됩니다. 일본은 패배를 빌미로 아리요시 중위를 파면시키고 야스카와를 총책임자로 임명합니다. 야스카와는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으로 진격합니다. 이들은 당시 엄청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군은 소총이 전부 인 반면 일본군은 기관총과 같은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전력차는 크게 나게 됩니다. 전력의 열세를 느낀 홍범도는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음을 짐작합니다. 그렇기에 아리요시 중위를 격퇴할 때처럼 매복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홍범도는 900여 명의 독립군을 봉오동에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립니다. 매복을 눈치채지 못한 일본군이 진격해 오자 독립군의 총구는 불을 내뿜고, 일본군은 하나둘씩 쓰러집니다. 당시 일본군은 매복에 대비하기 위해 척후병을 파견해 그지역을 먼저 순찰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홍범도는 봉오동으로 오는 길목에 한 군데만 빼고 매복을 시켰습니다. 매복을 제외한 지역에서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대응사격이 없던 마지막 한 군데를 매복이 없는 지역이라 착각합니다. 그리하여 그곳으로 전병력을 출격시켰는데 사실 이곳은 홍범도가 일본을 유인하기 위한 장소로 정한 곳이었습니다. 결국 홍범도의 작전대로 일본군은 매복이 없던 한 장소로 진격하고 이곳에서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훗날 전투가 일어났던 봉오동지역의 이름을 따서 봉오동전투로 불리게 됩니다.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이야기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봉오동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주역 홍범도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총력을 다했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대표적 인물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려 계획을 세웁니다. 야심한 밤 일본은 자객들과, 낭인들을 궁으로 보내 명성황후를 찾습니다. 명성황후는 숨었으나 결국 발견되고 그들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곧바로 조선에 있는 국민들에게 알려졌고 이내 국민들은 분노합니다. 전국적으로 알려지며 국민들의 분노가 확산되고 홍범도도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당시 홍범도는 27세였고 호랑이 사냥꾼이었습니다. 홍범도는 명성황후의 살해소식에 깊은 분노를 느끼고 목표를 호랑이에서 일본군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러고는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동료들을 소집합니다. 홍범도의 요청에 동료 68명이 모이게 되고 그들은 산포수 의병대로 불리게 됩니다. 그들은 갑산, 청진, 천불산 등 백두산 근처를 메인 무대로 정하고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연이은 승전보를 올리며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만세운동이 울려 퍼집니다. 그로 인해 항일정신이 상승하였고 많은 의병들이 만주로 모이게 됩니다. 홍범도는 그들을 모아 하나의 단체를 만듭니다. 그 단체의 이름은 대한독립군으로 훗날 봉오동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던 주력부대가 됩니다. 홍범도와 대한독립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연이은 전투를 치릅니다. 그들은 호랑이도 잡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열악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승전보를 올리게 됩니다. 대한독립군에게 연이은 패배를 당한 일본은 그들을 소탕하겠다 결심합니다. 당시 일본은 높은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기에 월강추격대라는 최신식부대를 파견합니다. 월강추격대는 두만강을 넘어 대한독립군이 있는 봉오동으로 향합니다. 봉오동으로 향한 월강추격대는 숨어있던 대한독립군 및 독립군부대에게 섬멸당하게 되며 우리 독립군은 큰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최신식 부대를 파견하여 독립군을 섬멸하려 했던 일본은 계획에 실패하자 분노가 극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간도에 있는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많은 이가 죽고 많은 것들이 파괴됩니다. 우리는 이를 간도참변이라 부르는데 이를 통해 많은 독립군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중 홍범도도 일본을 피해 러시아로 향합니다. 러시아로 향한 홍범도는 러시아 혁명군으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습니다. 홍범도는 그들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이고 조선의 독립을 도와달라 러시아에게 요청합니다. 러시아는 이를 수락하고 그들은 동맹관계가 됩니다. 홍범도는 러시아 혁명군을 도왔으나 러시아는 그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됩니다. 이에 홍범도는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군복을 벗은 채 농부가 됩니다. 현대에 우리는 이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고려인의 중심에는 봉오동전투를 이끈 홍범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개간하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일본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강제이주시키게 됩니다. 러시아는 그들을 6000km가 넘는 카자흐스탄에 이주시킵니다. 고령의 나이에 카자흐스탄에 이주한 홍범도는 결국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게 됩니다. 

     

    홍범도 그는 왜 귀환까지 78년이나 걸렸을까?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는 죽기 전 이러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대한의 독립을 볼 수 없음을 짐작한 홍범도는 자신이 죽고 조국이 해방된다면 자신을 조국에 데려다 달라고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그가 죽고 조선이 독립했지만 그의 유해는 78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무관심입니다. 홍범도는 삶의 오랜 시간을 러시아에서 보냈습니다. 미국의 영향으로 민주주의가 된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홍범도가 머물렀던 지역들은 다 공산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반공주의를 가진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홍범도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홍범도는 생전에 소련공산당에 가입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게 됩니다. 이러한 누명들과 오해로 인해 홍범도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죽기 전 이러한 유언을 남길정도로 자신의 조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던 홍범도는 7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카자흐스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홍범도의 유해를 송환하자는 결정이 났고 , 그의 유해는 2021년이 돼서야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최고의 예우 속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왔고 그토록 바라던 조국에 홍범도는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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